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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자이 작곡의 바이올린 소나타곡을 소개 합니다. 관리자
Hit: 1927 2015-05-18


월요 음악 이야기를 그동안 미디어실에서 소개하여 드리었으나 오늘 부터는 이벤트실에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정확한 정보가 유익한 정보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여 소개 하겠습니다. 

오늘 소개되는 음반은

벨기에의 작곡가이자 지휘자,바이올리니스트

벨기에 바이올리니스트 외젠-오구스테 이자이(Eugene-Auguste Ysaye)는 같은 시대의 다른 위대한 연주자들로부터 질투보다는 찬사를 받던 그 시대의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사람이었다.


무엇이 과연 외젠느 이자이로 하여금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바이올린의 제왕’으로 군림할 수 있게 했던 것일까?

이자이의 등장으로 인해 한때나마 전 유럽을 떠들썩하게 했던 세자르 통송(Cesar Thomson)의 핑거드 옥타브(fingered octave)주법도 순식간에 단순한 기교로 추락하게 되었다.

헬메스베르거(Jr.)의 제자들 중 가장 빛나는 재능의 소유자였던 프란츠 크나이젤(Franz Kneisel)과 비외탕에게 재능을 인정받았던 아메리카의 샘 프랑코(Sam Franko, 1857~1937)는 오케스트라의 숲으로 도피해야 했으며,전 유럽에서 칭송받은 프렌치 비르투오조 에밀 소레(Emile Sauret),마사르로부터 비에니아프스키를 보는 것 같다는 찬사를 들었던 프란츠 온드리지체크(Franz Ond?i?ek) 등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비르투오조들을 모두 침묵의 무덤으로 가게 했다.

그리하여 20세기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향후 그들의 필수적인 요소로서 남게 된 이자이 연주의 현대적인 특질에 대한 정확한 지적이 필요할 것이다.

 

가장 먼저 말해야 할 것은 그의 강렬한 톤이다.

이자이 이전의 어느 누구도 그만큼 현대적인 의미에서 톤의 강렬함과 지속성을 가진 바이올리니스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음악학자 마르크 팽슈를(Marc Pincherle)은 “이자이 그는 순수하면서도 고도로 진화된 사운드와 놀라울 정도로 빛나는 광채의 톤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는데,이는 곧 20세기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은 것이다.

프랑수와 뚜르뜨(Francois Tourte)의 혁명적인 활의 진보를 백그라운드로 파가니니가 열어 놓은 기교의 고속도로를 따라 제2,혹은 제3의 파가니니가 되기 위해 고난이도의 중음기법과 극도로 과감한 데망셰·바리오라쥐·그랑 데타세 등을 피나게 연습해야만 했던 1830년대 이후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과중한 테크닉의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했고,전 세대에 걸쳐서 이러한 경향들은 넓게 퍼져 나아갔다.

베를린의 요아힘 일파들만이 독자적인 자신들의 길을 걸어갔을 뿐,절대 다수의 연주가들은 파가니니 쇼크(Paganini's Shock)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 충격의 자장 안에서 피에르 로드(Pierre Rode,1774-1830),로돌프 크로이처(Rodolph Kreutzer)를 비롯한 소수의 예외자들은 오히려 희귀한 예로 남았고,프랑코-벨기에 악파의 유산을 이어받은 이자이도 이러한 경향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동시대의 사라사테가 조막만한 손으로 힘겹게 플라잉 스타카토(flying staccato)를 연마할 때,이자이는 떡두꺼비만한 손으로 너무나도 가볍게 테크닉의 모든 난점들을 마스터했다.

아마도 그는 고민했을 것이다.

파가니니마저 성취하지 못했던 ‘연속 슬러 스타카토’를 정복한 비에니아프스키의 조언 또한 이자이가 톤의 강렬함이라는 전대미문의 필살기(必殺技)를 창출하게 만들었던 요인으로 짐작된다.

여기에는 웅장한 톤의 소유자로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악몽에 휩싸이게 했던 아우구스트 빌헬미(August Wilhelmj)의 빛나는 성공이 일종의 자극제로 작용했을 것이다.

파가니니와 비에니아프스키의 전례가 입증하듯이 테크닉의 정복은 모든 세대의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하나의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다.

뿐만 아니라 이자이가 활동하던 19세기 말에는 음악 비평가들이 연주자들에게 연주기교 이상의 음악적 표현방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파가니니의 협주곡을 잘 연주하더라도 베토벤과 브람스의 협주곡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다면 일류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삶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남은 것은 테크닉 그 자체가 아니라 장엄하고 강렬한 톤이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입증한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는 아니었지만,적어도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영향력의 소유자가 이자이라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포스트 이자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연주가인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 중에

 나의 우상은 요아힘도 사라사테도 아닌 바로 외젠느 이자이였다”고 말하였고,다른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비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칼 플레쉬(Carl Flesch,1873-1944)마저도 “내 일생을 통해 들었던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들 중에서도 이자이가 가장 훌륭한 연주가였다”는 증언을 남기고 있다.

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가 연주회를 가지던 마지막 시기에 이미 강철 현이 거트현을 밀어내고 있던 시점이었고,따라서 이자이는 웬만해선 잘 끊어지지 않으며 하모닉스의 강렬한 효과음을 내기에 적절한 현대적인 E선을 사용한 연주자라는 점이다.

이자이는 곡의 인트로나 중반부에선 대단히 신중한 스트로크를 구사하였지만 코다에서는 활의 전체를 활용한 보잉을 즐겼으며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를 연주하는 데 있어 마지막 E 하모닉스에서 충분한 음을 내기 위해 가능한 한 활을 적게 쓰라고 지시하고 있다.

또한 브루흐의 ‘스코티쉬 환상곡’ 2악장에선 활의 윗부분을 사용한 폭발적인 업 보잉을 통해 화려함을 나타내었고,비외탕의 ‘바이올린 협주곡 5번’의 빠른 패시지에서는 활의 끝 부분으로 업보잉을 이용해 물결치듯 연주하고 있다.

개방현을 자주 이용한 연주를 했으며 지속된 음표의 마지막 음절에서 밀착된 다운 보잉을 하거나,갑자기 누름을 풀고,살며시 활을 중간 부분으로 끌어 당겼다가 활을 두 번 왕복시키는 사이에 짧은 간격으로 다운 보잉을 계속 사용했다.

그가 자주 애용했던 포르타멘토 운지는 셋째 포지션에서 A선상의 둘째손가락 E에서 첫째 포지션 A선상의 셋째 손가락 D로 내리는 것이었으며,여기에 한 손가락만을 사용하여 미끄러지듯 내리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하나의 손가락만으로 올리는 슬라이드도 사용했다.

이 모든 것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가 취해야할 행동은 단 한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이자이가 레코딩한 모든 연주를 담은 단 한 장의 음반(Sony Classical)을 구입하는 일이다(몇 곡의 주요한 레코딩이 빠져있지만).

 

레오폴드 모차르트의 비브라토에 대한 저주가 전 유럽을 뒤덮고 있을 때,거의 모든 바이올린 스쿨들은 거기에 맞춰 비브라토의 철저한 배제를 하나의 원칙으로 확립하였고 오직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되었다.

이 ‘현의 아름다운 진동’에 대한 루이 슈포어의 혐오는 너무나 유명했고,비브라토를 구사한 연주자는 무분별한 바이올리니스트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파리 음악원의 마사르 교실에서 다시 그 떨림의 파동이 새로운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 이래,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있어서 비브라토의 사용은 매우 중요하고도 민감한 문제였다.

비에니아프스키로부터 배운 이자이의 비브라토는 속도와 음색 등에서 극도로 다양했다고 평가되는데, 이 점은 어쩌다 한두 번씩 비브라토를 사용한 요아힘이나,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평면적인 비브라토를 사용했던 사라사테의 비브라토와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요하임은 제자들에게 비브라토의 빈번한 사용을 구원받지 못할 죄악의 하나로 언급했다).

다만 그와 견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바이올리니스트인 예뇌 후바이(Jeno Hubay)의 광범위한 비브라토의 활용은 이자이에게도 의미 있는 반응을 이끌어냈을 것이다.

이자이의 제자였던 이르마 쟁거-세테(Irma Saenger-Sethe)는 지속적인 비브라토에 대한 스승의 거듭되는 강조를 전하고 있지만,그렇다고해서 그의 비브라토를 하이페츠식의 강렬하고 자극적인 성격의 비브라토라고 성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현대적인 의미의 비브라토는 1917년을 전후로 급속한 발전이 있었고,그것은 그 전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종류의 것이었다(오로지 크라이슬러만이 예외에 속했다).

실제로 아우어는 그의 제자들이 비브라토를 남발하고 있다고 분통을 터트렸고,이런 경우가 단지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양식의 부활이었고,우리는 17세기 프랑스 바이올리니스트 마랭 메르센(Marin Mersenne)의 “영혼을 매료시키는 어떤 진동”과 그 진동을 불러일으키는 기술적인 문제까지 세세하게 다룬 저서 를 기억하고 있다.

 

1869년,리에주 음악원(Liege Conservatoire)의 주임 교수였던 데지레 헤인베르크(Desire Heynberg)는 자신의 바이올린 클래스에서 연주를 배우고 있는 11살의 어린 소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동안 고민한 끝에 아이의 부모들을 불러 이 소년에게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교육을 계속한다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진지하게 충고했다.

그는 '시간낭비'라는 말까지 써가며 욕심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말까지 전했지만 헤인베르크의 충고는 자식의 재능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가득찬 부모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

니콜라 이자이(Nicholas Ysaye)와 마리 테레즈 소티오(Marie-Therese Sottiaux)가 그 부모들의 이름이었고,이 재능 없다고 판단된 소년은 다가올 세기의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리게 될 외젠느 이자이(Eugene Augute Ysaye, 1858~1931)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헨릭 비에니아프스키와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11살,12살 때 모든 사람들의 질투를 받으며 파리음악원을 졸업하던 것에 비하면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었던가?

그는 대부분의 천재들이 자신들의 재능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을 바로 그 시점에 바이올리니스트로의 재능을 심각하게 의심받았던 것이다.

그는 이미 일곱 살의 나이에 대중 앞에서 연주했지만,그것이 곧 성공의 신화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며 더구나 어린 이자이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고 있었다.

그와 잠시 인연을 맺었던 랑베르 마사르(Rodolf Lembert Massart)가 그에게 축복의 키스를 해주었지만,이 심약한 바이올리니스트의 비극적인 상상력은 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런 그에게 앙리 비외탕이라는 당대의 비르투오조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는 건 그 자신에게 믿을 수 없는 사실로 나타났을 것이다(일설에 의하면 비외탕이 그의 집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이자이의 연주를 듣고 감동하여 그를 브뤼셀로 데려왔다고 하는데, 확인되지 않은 소문일 뿐이다).

모든 연대기는 출생이라는 진부한 사실로부터 출발하는데,이자이의 음악적 삶은 그 진부한 사실을 잊게 할 만큼 흥미로우며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었다.

1858년 7월 16일 벨기에의 리에주에서 태어난 이자이는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로부터 첫 개인 레슨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의 나이 다섯 살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신동이 아니었기에 분더킨트(Wunderkind)의 찬란한 미래가 보장되지는 못했으며,비록 겉으로는 오만한 비르투오조로 비춰졌지만 죽을 때까지 이자이 자신은 스스로의 재능에 대해 의심해 왔다.

 

1868년 어머니의 사망과 스승과의 불화로 그는 아버지와 함께 콘서트 투어를 떠났고 아버지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했다.
1872년 리에로 돌아와서 Rodolphe와 Lon Massart를 사사하여 1879년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했다.
브뤼셀(Brussels)에서 비에냐프스키(Wienawski)에게서 공부를 계속 했고 후에 1876년부터 1879년까지 파리에서 비외탕(Vieuxtemps)을 사사했다.

파리를 떠난 후,이자이는 1882년까지 베를린의 Benjamin Bilse 오케스트라의 수석으로 있었다. (Benjamin Bilse beer-hall orchestra는 후에 Berlni Philharmonic이 된다) 많은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음악가들이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왔고,그중에 죠셉 요아힘(Joseph Joachim),프란쯔 리스트(Franz Liszt),클라라 슈만(Slara Schumann),그리고 이자이에게 계약을 그만두고 같이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한 안톤 루빈슈타인(Anton Rubinstein)이 있었다.
그 시기에 그만의 음악 발전에 도움을 준 안톤 루빈슈타인과 함께 스칸디나비아와 러시아로 콘서트 투어를 떠났다.

1883년 그는 파리로 돌아와서 세자르 프랑크(Csar Franck),까미유 생상(Camille Saint-Seans) 그리고 젊은 세대의 에른스트 쇼송(Ernest Chausson),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빈센트 당디(Vincent D'Indy),그리고 당시 프랑스 바이올린 음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던 끌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와 같은 유력한 작곡가들과 교류를 했다.

 27세때 파리의 Concerts Colonne중 하나의 독주자로 추천되었고 음악 연주자로서의 시작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다음해에 이자이는 조국인 벨기에의 브뤼셀 음악원의 교수직을 수여받았다.

이것으로 1898년 그가 음악원을 떠난후,그의 마지막 해 까지도 그의 주된 일 중 하나였던 지도자로서의 경력이 시작되었다.
그의 훌륭한 제자들 가운데에는 요제프 긴골드(Josef Gingold),비올리스트 윌리엄 프림로즈(William Primrose),나탄 밀슈타인(Nathan Milstein),루이스 페르싱어(Louis Persinger),알베르토 바흐만(Alberto Bachmann),매튜 크릭붐(Mathieu Crickboom),그리고 야샤 브로드스키(Jascha Brodsky)가 있다.

음악원의 교수로 재직중에도 이자이는 유럽 전역과 러시아,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세계의 더 넓은 지역에서 계속해서 순회공연을 가졌다.
특히 그의 손의 상태와 연관된 (아마도 당뇨와 관련된) 건강상의 문제에도 이자이는 연주에 최선을 다했고,끌라우드 드뷔시,까미유 생상,세자르 프랑크,그리고 에른스트 쇼송을 포함한 많은 저명한 작곡가들이 그에게 주요한 작품들을 헌정했다.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그에게 결혼 선물로 헌정되었고 이자이는 1886년 브뤼셀에서,그 후 파리에서 초연을 했다.
다른 헌정곡들은 쇼송의 포엠(Peom)과 바이올린 협주곡,그리고 드뷔시의 현악사중주가 있다.

그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자,이자이는 더욱 교육과 지도와 작곡에 열중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에는 6곡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op.27, 한곡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 op.28,두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여러 독주자들 (한대 또는 두대의 바이올린,비올라와 첼로,현악 사중주)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위한 8곡의 시(poeme elegiaque,poeme de l'Extase,Chant d'hiver, poeme nocturne,기타),베이스를 제외한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poeme de l'Exil), 두 곡의 현악삼중주,한곡의 현악오중주,그리고 생애 말기에 왈론 사투리로 쓰인 한곡의 오페라(Peter the Miner)가 있다.

Pire li houeu(Peter the Miner)는 리에와 브뤼셀에서 상연을 했고,그는 건강상 브뤼셀의 상연에만 참석했는데,그가 1931년 5월 12일,사망하기 3주 전이었다.

1898년 이자이는 뉴욕 필하모닉(New York Philharmonic)의 지휘자 자리를 제의받았으나 독주 스케쥴로 바뻐서 사절했다.
1918년 그는 신시내티 심포니 오케스트라(Cincinnati Symphony Orchestra)의 지휘자를 수락하고 1922년까지 있으면서 여러 녹음을 남겼다.

 

칼 플레쉬는 1930년,'작곡가로서의 이자이의 위치는 아직 최정상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가 작곡한 7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완전히 무시되었고,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몇 개의 소품을 제외한 스무 곡 이상의 다른 작품들도 악보 위의 음표로만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무대에 올려지지 않은 희곡의 가치와 거의 동일하다.

즉,불완전한 가치밖에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공연되지 않은 악보와 희곡은 그것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 가치는 절반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루카치가 <역사와 계급의식>을 출판 하던 1923년,요제프 시게티가 연주하는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듣고 있던 이자이는 새로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를 생각했고,자신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걸 생각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신열(身熱)과 감동으로 들뜬 상태에서 거의 하룻밤 사이에 대부분의 스코어를 완성시켰다.

그 다음 해에 악보로 출판된 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Op.27은 이 곡을 연주하는 사람에게 악몽 같은 경험과 함께 끝없는 환희의 도취를 모두 던져준다.

우선 오스카 셤스키의 연주(Nimbus/1982)를 보자.

아우어의 마지막 제자로 러시안 주법의 모든 것을 전수 받은 그의 레코딩은 고전적인 기품과 명확한 아티큘레이션, 그리고 폴리포니적인 효과가 뛰어나다.

이 점은 이자이가 꿈꾸었던 세계를 직선으로 가리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마력적인 음색과 찬연히 빛나는 테크닉으로 호흡과 운궁 사이의 새로운 긴장관계를 발생시키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

4번 소나타의 2악장 사라방드에서 4개의 리듬으로 구성된 오스티나토 리듬을 살려내는 그의 보잉과 스타카토는 고전과 모던의 두 가지 방향성을 동시에 표출해내고 있다.

가장 이상적인 프레이징과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왼손의 폭넓은 활용은 이 곡에 뜨거운 숨결을 부여했으며 비길 데 없는 역작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기돈 크레머의 연주(Melodiya-JVC/1978)는 텍스트를 낱낱이 분해하는 과정 속에서 피부 위로 돋는 소름의 느낌을 선사하는데,그의 귀기서린 스트로크는 이 곡의 정체성을 새롭게 환기시킨다.

여기에는 호프만(E.T.A. Hoffman)적 환상과 존재의 불협화음이 극도로 예민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 음반에는 아직 20대의 젊은 크레머가 팽팽한 긴장감과 그로테스크함을 넘어 존재하는 의식의 확장을 보여주고 있다.

크레머의 음색은 아주 차갑지만,그 차가움의 이면에 존재하는 은근한 열기를 표현할 줄 알기 때문이다.

리디아 모르드코비치의 연주(Chandos/1986)는 팽창하는 에너지와 탄식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을 이루고 있다.

프레이징과 프레이징 사이를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면서 전체적으로 가장 드라마틱한 연주로 마치 아마겟돈의 전쟁터처럼 분노와 광기로 뒤덮여 있지만,각각의 음들은 명확하게 통제되어 있다.

특히 2번과 3번 발라드의 연주는 격정적인 환희,핏줄을 타고 빠르게 전달되는 불안감이 충격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보다 놀라운 것은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는 프레이징이다.


이자이는 모든 레파토리에 능숙한 연주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바하와 베토벤의 해석은 감탄스러웠고 그 이후의 작곡자들이나,후기 낭만파나,그리고 초기 근대 작곡가들의 작품들에 매우 뛰어났다.
특히 막스 부르후(Max Bruch),까미유 생상,그리고 프랑크는 그를 자신들의 가장 뛰어난 해석자로 불렀으며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에도 의심의 여지없이 최고였다.
그의 테크닉은 화려했고 정교하게 연마되었으며,어떤 음악적인 의미 없이는 사용하지 않았다.

이런점에서 그는 최초의 현대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생각된다.
이자이는 비에냐프스키와 비외탕을 본받아 바이올린 연주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그의 연주와 교습법에 관한 많은 회고담들이 있다.
예후디 메뉴힌(Yehudi Menushin)은 자신의 스승인 루이스 페르싱어의 은사,이자이를 만나기 위해 브뤼셀을 방문해서,다른 훌륭한 지도자들에게도 학생들에게 강조하라고 말하던 조언인,스케일과 아르페지오를 연습하라는 매우 적절한 가르침을 받은 일을 회상한다.
요제프 시게티(Joseph Szigeti)는 이자이를 너무 이른 때에 비브라토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창시자로 회상했으며,여기에서 이자이 스스로 비브라토를 엄격히 사용한 이유를 발견한다.

한편으로 칼 플레시는  이자이의 영향이 가장 중요하고 지속적이었다고 공언했다.

연주자로서 이자이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고 매우 개성적이었다.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는 이자이 같은 연주자는 유래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고,칼 플레시(Carl Flesch)는 그를 "내 생애 들어본 가장 걸출하고 개성적인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말했다.

당뇨로 극심히 고생하여 왼발을 절단해야 했던 외젠 이자이는 끝내 1931년 사망하여 브뤼셀의 Ixelles Cemetery에 묻힌다.
1937년 그를 추모하여 외젠 이자이 국제 콩쿨(Eugene Ysaye International Competition)이 창립되었고,1951년에 퀸 엘리자베스 콩쿨(Queen Elisabeth Music Competition)로 바뀌었다

[출처] ■ 외젠 이자이,Eugene-Auguste Ysaye (1858 - 1931)|작성자 빈들

 

 

 

그리스 태생의 바이올린 연주자 레오니다스 카바코스 의 연주는 부드러움과 테크닉 믹싱의 조화가 절묘하다  하리 만큼입니다.

바이올린 솔로 음악은 저가 최근에 설명한 인크로저의 재질과 유닛트의 재질에 구조적 결함이 있는 스피커에서는

이러한 독주곡 음악은 청취자의 가슴에  감동을 선사하기에 역부족하여 오늘 추천드린 음반 선택을 하시면

추천한 저를 원망하게 될것입니다.

이러한 소나타곡을 가장 멋지고 아름답게 소화하고 표현하는 스피커가 무엇인가 찾는다면 단연 필드타입의

스피커라 하겠습니다.

오늘 추천의 수록곡은 이자이 작곡의 소나타1번에서 부터 6번까지 연주된 음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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